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 일 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 임제,『임제어록』에서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무협지에 푹 빠져 지냈다.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되는 국립고등학교를 다녀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에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갈 수 없으니 나는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나의 파라다이스, 무협지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학교만 다녀오면 자취방에 틀어박혀 만화방에서 빌려온 무협지를 읽었다. 와룡생 작품이 특히 좋았다.

새벽 서너 시까지 나는 무림의 절대 지존이 되어 강호를 누비고 다녔다. 소림사를 위시한 정파인 9대 문파들의 장문인, 장로들 속에는 위선자가 많았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가혹하게 응징했다.

아마 선한 얼굴의 학교 교사들을 위시한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분노가 그렇게 표출되었을 것이다. 자취방과 학교만 오고가는 모범생의 깊은 마음속에 마그마 같은 분노가 들끓고 있다는 것을 그 어느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엽기적인 연쇄살인범들을 잡고 보면 다 모범생들이다. 이웃 사람들에게 인사 잘하고 평소에 말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마나 긴 시간동안 분노의 대상을 마음속에서 응징해왔을까?

우리는 현실이 너무 힘들면 현실을 떠난 상상의 나라로 날아간다.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은 이렇게 탄생한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인간의 기원을 찾아나서는 공상과학 영화다.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나를 압도한다. 그리곤 나를 끌고 간다. 배우들과 함께 우주선을 타고 수만 광년 떨어진 은하계로 날아간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온다. 재미가 없다. 나는 이제 이따위 ‘아편’이 필요하지 않다.

도대체 인류의 기원이 왜 궁금한 거야?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벌컥 화를 냈다. “삶도 모르는 데 웬 죽음이냐?”

그렇다. 그따위 질문들은 지금 여기의 ‘나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빈곤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평상시 일 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마음을 잃어버린, 항상 조급해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강박증 환자가 되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이다.

임제 선사는 ‘어느 곳에 이르던지 간에 주인이 된다면 여러분이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참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채찍을 휘두른다.

우리는 짐을 잔뜩 지고 헉헉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가 되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질문할 줄 모른다.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이제는 낙타가 되지 못한 인간들이 아우성친다. “우리 등에도 짐을 얹어 주세요! 제발.”

밤이 되어 피곤에 지친 낙타들은 이상한 나라로 날아간다. 밤거리는 파라다이스다. 아침이 되면 잠결에 낙타들은 다시 사막으로 부리나케 달려간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 박재삼,《천년의 바람》부분

즐거운 아이 같은 바람. 지치지도 않고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아직도 하고 있다. 박재삼 시인은 비가(悲歌)를 읊는다. 이상한 것만 찾아 헤매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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