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2010년쯤에 내가 겪었던 실화이다. 제주시내의 어느 서점을 들르니 마침 주인은 탐라시대의 상고사 연구한답시고 중국에서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한 책에 몰입해 있었다. 그는 그 책을 내게 보이며 탐라국이 중국 본토에서 건국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때 북위(北魏)에서 산동성에 설치한 주 가운데 제주(濟州, 齊州)가 있기는 하다. 423년(北魏 泰常8年)에 설치하여 1348년(元 至正8年)에 폐지한 주(州)이다. 그러나 이 북위의 제주는 탐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그의 주장이 너무 얼토당토않아 물었다. “중국 내륙의 제주도 탐라라 했습니까? 거기도 섬이고, 삼성혈(三姓穴)이 있습니까?” 나의 물음에 우물쭈물하기에, 다시 나는 “제주인을 중국 사람 만들지 말아요”라고 하였다.

탐라국은 제주도를 비롯하여 그 인근 섬에 실존했던 해상왕국이다. 지금은 그 실체가 희미하지만, 제주도 곳곳에 박힌 역사의 흔적(유적)과 단편적인 고문헌으로 탐라국의 얼개가 적지 않게 드러난다.

(25) 탐라국을 실증하는 고문헌은 있는가?

탐라국(耽羅國)은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섬 제주도에 있었던 소국(小國)이다. 그러나 탐라국 시대에 탐라국인이 남긴 직접적인 고문헌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주도에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융기문 토기, 타제 석창이나 돌도끼 등 B.C.3000년 이전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패총에서는 무문토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주시 삼양동(三陽洞)에서는 청동기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원형의 주거 형태가 발견되었다.

나는 초기 철기시대(鐵器時代)부터 탐라국은 형성된 것으로 본다. 즉 탐라국은 후조선(後朝鮮)이 망하고 이른바 한반도에 여러 소국이 생겨나는 B.C.3세기에 그 존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 시기 중국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B.C.221년 이전이다.

철기시대의 탐라는 인구가 늘자 농경에 적합한 토지가 부족하였고, 필요한 물품을 자체에서 충분하게 생산할 환경도 안 되었다. 따라서 탐라국은 주변 지역과 교류를 해야 할 당위성과 자위력(自衛力)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제주도에 부족국가형태의 소국으로서의 탐라국이 형성된 것이다. 즉 경제사학에서는 단군신화의 신시(神市)를 고대의 시장(市場)으로 볼 수 있다. 그렇듯이 탐라국에서도 고대의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오수전』, 1928년 산지천 공사중에 출토. 국립제주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오수전』, 1928년 산지천 공사중에 출토. 국립제주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출토한 오수전(五銖錢) 4점과,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화포(貨布)를 근거로 삼성혈에서 가까운 산지천에 탐라 판 신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도를 보면 지금의 동문시장 일대로, 이곳은 탐라국시대부터 시장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 부근 어디에 선창(船廠, 조선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주지』에는 건입포(健入浦)가 언급되어 있다. 건입포는 지금의 건입동으로 제주항만 자리이며 산지천의 하류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가. 탐라국 개략

탐라국에 대한 개략(槪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탐라국(耽羅國)」 항목을 그대로 전재한다.

「탐라국(耽羅國)」 :
“지금의 제주도에 있었던 옛 나라.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렸던 칭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 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 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 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다.”

나. 탐라국을 언급한 중국 문헌

탐라국에 대한 최고의 기록은 진수(陳壽, 22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주호(洲胡)’라는 호칭이다. 즉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에서 물건을 사고판다.”라고 한 것이다.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丁謙曰, 州胡, 卽今之濟州無疑. 其人差短小校勘,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校勘, 好養牛及豬.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校勘. 乘船往來, 市買韓中校勘. 范書, 作乘船往來, 貨市韓中.”)

여기에서의 주호국이 바로 탐라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이 기록은 당시 제주도에는 주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외에도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편찬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참고하면 7세기 탐라인들의 생생한 삶이 되살아난다. 당시 제주인들은 개와 돼지를 키워서 고기를 먹은 후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여름에는 초가에서 살다가 추운 겨울 되면 자연 동굴에서 기거했다. 오곡이 나지만 소로 밭을 갈 줄을 몰라 따비로 땅을 파 농사를 지었다.

『당회요』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문무왕 1, 661)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나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다. 우리나라의 탐라국 문헌 정이오 편저 『영주지』

『고씨족보』에 수록된 「영주지」 부분, 1725년, 목판본,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고씨족보』에 수록된 「영주지」 부분, 1725년, 목판본,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고씨세보』에 수록된 「영주지」,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서두에 ‘삼성혈’ ‘삼사석’ ‘칠성도’ ‘건입포’가 들어 있다.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고씨세보』에 수록된 「영주지」,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서두에 ‘삼성혈’ ‘삼사석’ ‘칠성도’ ‘건입포’가 들어 있다.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탐라국이 우리 역사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기사로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주었다”라는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탐라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재 전하는 『영주지(瀛洲誌)』는 제주도의 개벽신화와 조선초기까지 천 수백 년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으므로 문헌이 부족한 제주도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내가 보기에는 『영주지』는 『삼국유사』가 편찬(1281년)되고 『고려사』가 편찬(1451년)되는 사이에 쓰인 것 같다.

지금까지 이 『영주지』의 편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1820년판 『청주고씨족보』에는 1416년 7월에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쓴 기(記)가 있어, 『영주지』는 정이오의 편저(編著)임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 1820년판 『청주고씨족보』판 『영주지』와 1918년판 『제주고씨세보』판 『영주지』는 기본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면서도 서두(書頭)와 주기(註記)가 약간 다르다. 1918년판 『제주고씨세보』에는 서두에 ‘삼성혈’ ‘삼사석’ ‘칠성도’ ‘건입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1820년판 『청주고씨족보』에는 그 부분이 없다. 이를 보면 정이오는 1416년 7월에 『영주지』를 지었지만, 전래되면서 후인들이 일부 발췌하고 주를 추가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이오는 1416년 7월에 「성주고씨전(星主高氏傳)」도 함께 지었다. 한편 1820년본 『청주고씨족보』의 『영주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고씨족보』 1725년 목판본 『영주지』와 동일하다. 대체적으로 『영주지』는 고씨 가문에서 족보에 넣어 유포하여 왔으나, 필요한 일부만을 발췌하여 각기 주를 붙여 사용한 것 같다.

『영주지』의 내용 기록은 1451년에 편찬이 완성된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거의 그대로 등장한다. 『고려사』 권57 志 권제11, 지리2에 의하면, “耽羅縣在全羅道南海中. 其古記云, “太初無人物, 三神人, 從地聳出【其主山北麓, 有穴曰毛興, 是其地也.】, 長曰良乙那, 次曰高乙那, 三曰夫乙那. 三人遊獵荒僻, 皮衣肉食. 一日見紫泥封藏木函, 浮至于東海濱, 就而開之, 函內又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 隨來. 開石函, 出現靑衣處女三, 及諸駒犢五穀種. 乃曰, ‘我是日本國使也. 吾王生此三女云, 「西海中嶽, 降神子三人, 將欲開國, 而無配匹.」 於是, 命臣侍三女, 以來爾. 宜作配, 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三人, 以年次, 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良乙那所居, 曰第一都, 高乙那所居, 曰第二都, 夫乙那所居, 曰第三都. 始播五穀, 且牧駒犢, 日就富庶.”라고 하였다.

즉 “탐라현(耽羅縣)은 전라도(全羅道)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으니【그 주산(主山)의 북쪽 기슭에 구멍이 있는데, 모흥(毛興)이라고 한다. 이곳이 그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良乙那)라고 하였고, 그다음을 고을나(高乙那)라고 하였으며,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다.

세 사람은 거친 땅에서 사냥질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하루는 자주색 진흙으로 봉해진 나무 상자가 바다에서 떠다니다 동쪽 바닷가에 닿은 것을 보고 가서 열어보니, 상자 안에 또 돌 상자가 있었으며, 붉은 띠와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 나왔다. 돌 상자를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와 송아지(駒犢)와 오곡(五穀)의 종자가 나왔다.

사자가 ‘우리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는, 「서해(西海)의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세 여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는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또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어제응제시주』의 「탐라」, 권람, 1462년(초판본),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어제응제시주』의 「탐라」, 권람, 1462년(초판본),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려사』의 이러한 모흥혈 신화는 1452년(문종 2) 2월 22일에 왕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 1454년(단종 2) 3월 30일 완성한 후, 단종에게 올려진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에도 그대로 수록하며, 또한 1461년에 권람(權擥, 1416~1465)이 주기(註記)를 붙이고 1462년에 목판본으로 초판 간행한 『어제응제시주(御製應製詩註)』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고기(其古記)”는 그곳의 고기(古記), 즉 탐라의 고기(古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탐라의 고기란 어느 책인가? 『영주지(瀛洲誌)』 이전에 고기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영주지』를 말하는 것일까?

현존하는 『영주지』는 1416년에 편찬된 것이지만, 제주도 역사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영주지』는 『고려사』에 수록한 탐라의 고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보이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고려사』에는 “長曰良乙那, 次曰高乙那, 三曰夫乙那”로 되어 있으나 『영주지』에는 “長曰高乙那, 次曰良乙那, 三曰夫乙那”로 되어있고, 그들의 배우자도 『고려사』에는 “일본국(日本國)으로 되어 있으나, 『영주지』에는 ‘벽랑국(碧浪國)’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416년(태종 32)에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저술한 「성주고씨전(星主高氏傳)」에는 다시 ‘일본국’으로 되어 있는데, 고득종(高得宗)이 1450년에 지은 「서세문(序世文)」에는 ‘벽계국(碧溪國)’으로 나온다.

왜? 이런 차이가 보일까? 『영주지』와 『고려사』가 삼성의 순서가 다른 것은 1442년에 춘추관기주관으로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해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참여한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주도하여 순서를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증보동국여지승람』 권지38 「제주목」,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증보동국여지승람』 권지38 「제주목」,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탐라지』, 이원진, 목판본, 1책.(영인본 사진) 이원진의 『탐라지』는 사찬(私撰) 지방지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탐라지』, 이원진, 목판본, 1책.(영인본 사진) 이원진의 『탐라지』는 사찬(私撰) 지방지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증보동국여지승람』 권지38은 「제주목」을 다루고 있고,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탐라지(耽羅志)』는 『증보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여 사찬(私撰)한 지리지이다. 그런데 『증보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를 따라서 양고부(良高夫) 순이지만, 『탐라지』에서는 『영주지』를 따라서 고양부(高良夫) 순이다.

라. 벽랑국의 실체는 마한의 어느 소국

삼성이 ‘양고부(良高夫)’냐 ‘고양부(高良夫)’냐 하는 문제는 해당 씨족에게는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벽랑국’ 또는 ‘벽계국’이냐 ‘일본국’이냐는 것도 민감한 분에이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동북삼성과 한반도에는, 즉 우리 민족의 역사영토영역에는 70여 국이 넘는 소국이 명멸하였다. 그중 하나가 탐라국으로 이 해상왕국은 70여 소국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72국’ 조에 “七十二國 /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 初置爲四郡 後置二府 法令漸煩 分爲七十八國 各萬戶 [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 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이라 적고 있다.

즉 “72국 / 『통전(通典)』에는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0여 국이 되었는데, 지역은 모두가 사방 백리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에는 “서한이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후에는 2부를 두었더니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되었으니 각각 만호씩이다.”라고 하였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소읍(小邑)이 모두 나라로 일컬었으며,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이 나라를 일컬었고,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12개의 소읍으로 각각 나라를 일컬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이 소국들은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3~2세기경부터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한반도의 고대사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 72개 소국은 연맹 형태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따르면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국이 있다.(‥‥‥馬韓在西, 有五十四‥‥‥)라고 하였다.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의 개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54개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을 걸로 추정된다. 달리 말하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한 내 도시 국가체(國家體)가 최소한 54개나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소국들은 당시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나 남해에 인접한 지역이다.

벽랑국은 이 서해나 남해에 인접한 마한의 한 성읍(城邑)국가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남 완도군의 소랑도에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결론이다. 소랑도는 성읍국가로 인정되기에는 면적과 거주의 한계가 있고,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나 출토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벽랑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마한의 어느 해변가에 있는 소국일 것으로 보인다. 말과 소를 키우고 오곡을 재배할 수 있는 평야를 낀 지대(地帶)이다.

마. 내가 보는 초기 탐라국의 이해

기원전후(紀元前後)의 탐라국은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있어 외부 침략으로부터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나는 초기의 탐라국은 세 개의 부족국가 연합체로 판단한다. 삼성인의 양고부 또는 고양부의 부족국가 연합체이다.

모흥혈(毛興穴)에서 함께 용출한 삼성인(三姓人)의 성은 고씨(高氏) 양씨(良氏, 梁氏) 부씨(夫氏)로 각기 다르나, 이름은 모두 을나(乙那)로 같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원래 우리나라에서 성(姓)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때부터 사용하였다는 것이 보학계(譜學界)의 정설이다.

삼성인이 모두 이름이 같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이름을 똑같이 짓지는 않는다. ‘을나’란 순수한 우리 말을 이두(吏讀)로 ‘을나’라 표기한 것일까? 혹 ‘을나’란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의 사투리에서 보이는 “얼라(어린아이)”와 같은 의미는 아닐까? 아니면 ‘을나’란 신분이나 직위를 말하는 제주의 고대 사투리인가?

나는 ‘을나’란 그 시대 고대인들의 직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을라’란 북방민족 언어로 ‘대족장’ 또는 ‘왕’이라는 뜻이다. 삼성인은 모두 탐라의 세 부족국가의 왕이자 대족장이었고,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자체가 초기의 탐라국이자 도읍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삼성인의 성으로 인식하는 고씨(高氏) 양씨(良氏, 梁氏) 부씨(夫氏)는 후대에 한자식으로 만든 성씨이다. 초기 탐라국 시대에는 탐라식 부족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21년 12월조에 “冬十二月 耽羅國太子末老來朝, 賜星主王子爵.”이라하며 ‘말로(末老)’의 이름에 성씨(姓氏)를 붙여 기록하지 않았다.

고씨로서 성을 붙여 기록한 최고(最古)의 인물은 『고려사』 권98 「열전」 권제11에 나오는 고조기(高兆基, 1088~1157)로서 그는 말로(末老)의 손자이다. 즉 제주고씨가 ‘고(高)’라는 성씨를 사용한 것은 11세기 말이다. 이는 타성씨에 비하여 상당히 이른 것으로서 그들이 제주의 실제적인 권력을 쥔 토호(土豪)였기에 가능한 일로 보인다.

고씨세보에서 말하는 탐라국의 건국연대 BC 2337년은 단군의 건국연대를 의식하여 연대를 올려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탐라국의 건국 및 형성시기는 언제인가? 학계에서는 기원후(A.D.) 3세기로 본다. 나도 한때 그 관점을 수용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보다 450~500년 앞선 기원전(B.C.) 3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삼성인은 철기시대에 고조선 유민들로서, 그들은 당시로서는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제주도에 도래(渡來)한 후 제주의 지배 세력으로 출현함으로서 탐라국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 탐라국왕계보의 문제점

『고씨족보』에 수록된 「탐라왕대」 부분, 1725년, 목판본,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고씨족보』에 수록된 「탐라왕대」 부분, 1725년, 목판본,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탐라국 시대는 언제인가?

『제주고씨세보』에서 주장하는 대로 BC 2337년부터 시작하는가? 탐라국 신화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1725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고씨족보』 4책 가운데 권1의 상대(上代) 계보를 정리하면 시조 고을나(高乙那)로부터 자견(自堅)까지의 45세(世)의 세계(世系)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제주고씨세보』의 고을나 부분,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고씨세보』의 고을나 부분,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 탐라왕시대

(1). (高)을나(乙那) / (2). 건(建) / (3). 삼계(三繼) / (4). 일망(日望) /
(5). 도제(島濟) / (6). 언경(彦卿) / (7). 보명(寶明) / (8). 행천(幸天) / (9). 환(歡) /
(10). 식(湜) / (11). 욱(煜) / (12). 황(惶) / (13). 위(偉) / (14). 영(榮) /
(15). 후(厚) : 신라 성시(盛時)에 아우들과 함께 삼형제가 항해하여 탐진(耽津)에 도착하여 신라로부터 ‘성주(星主) 탐라왕’이라고 칭호를 받다. 제주고씨문중에서는 그의 재위연대를 B.C.58년부터 B.C.7년까지로 주장한다. /
(16). 두명(斗明) / (17). 선주(善主) / (18). 지남(知南) / (19). 성방(聖邦) /
(20). 문성(文星) / (21). 익(翼) / (22). 지효(之孝) / (23). 숙(淑) / (24). 현방(賢方) /
(25). 기(璣) :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병진(476년)에 사신을 보내다. /
(26). 담(聃) : 백제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이 정벌해 오자 신라에 입조하다. /
(27). 지운(指雲) / (28). 서(瑞) / (29). 다명(多鳴) / (30). 담(談) /
(31). 체삼(體參) / (32). 성진(聲振) / (33). 홍(鴻) / (34). 처량(處良) /
(35). 원(遠) / (36). 표륜(表倫) / (37). 형(逈) / (38). 치도(致道) /
(39). 욱(勖) / (40). 천원(天元) / (41). 호공(好恭) /
(42). 소(昭) :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때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43). 경직(敬直) / (44). 민(岷) / (45). 자견(自堅)

■ 성주왕자시대(星主時代)

① 말로(末老) :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무술(938)에 입조(入朝)하여 ‘성주왕자(星主王子)’라는 칭호를 받다.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21년 12월조. “冬十二月 耽羅國太子末老來朝, 賜星主王子爵.”, 이름에 성씨를 붙여 기록하지 않았다. /
② 고유(髙維) / ③ 고조기(髙兆基) / ④ 고정익(髙挺益) / ⑤ 고적(髙適) /
⑥ 고여림(髙汝霖) / ⑦ 고정간(髙貞幹) / ⑧ 고순(髙巡) / ⑨ 고복수(髙福壽) /
⑩ 고인단(髙仁旦, 仁朝) / ⑪ 고수좌(髙秀佐) / ⑫ 고석(髙碩) / ⑬ 고순량(髙順良) /
⑭ 고순원(髙順元) : 고순량의 제 / ⑮ 고명걸(髙明傑) : (?) /
⑯ 고신걸(髙臣傑) : 고순완의 자 / ⑰ 고예봉(髙禮鳳) /

이상의 세계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위의 이름들은 모두 한문식 이름이다. 그런데 『고려사』에 등장하는 성주왕자들의 순 우리 말 이름은 『제주고씨세보』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고려사』 「세가」 권제6, 정종(靖宗, 재위 1035~1046) 9년 12월 27일 조에 “十二月 庚申 乇羅國星主游擊將軍加利奏, “王子豆羅近因卒, 一日不可無嗣, 請以號仍爲王子.” 仍獻方物.”라고 하였다. 즉 “12월 경신 탁라국(乇羅國)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王子) 두라(豆羅)가 최근에 죽었는데, 하루도 후계자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호잉(號仍)을 왕자로 삼게 해주십시오.”라며 토산물을 바쳤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가리(加利)’와 그의 아들 ‘두라(豆羅)’와 ‘호잉(號仍)’은 고씨세보에 없다. 그러나 ‘가리(加利)’와 그의 아들 ‘두라(豆羅)’와 ‘호잉(號仍)’은 우리 말 이름을 한자식으로 적은 것이므로 실존 이름이다. 이외에도 『고려사』에는 여러 성주의 우리 말 이름이 더 나오지만 『제주고씨세보』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고씨세보』를 편찬할 당시에는 탐라국 국왕의 계보와 성주왕자의 계보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고려사』도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구전(口傳)으로 알려져 온 탐라국왕들의 일부 이름들도 한자식(漢字式)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 2월 조에는 “躭羅國主佐平徒冬音律來降. 躭羅自武徳以來, 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降爲屬國.”이라고 하여 “탐라국주(躭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武徳) 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해 왔기 때문에 좌평(佐平)을 관직 호칭으로 썼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해서 속국이 되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직전 해인 661년에 당(唐)에 조공을 바친 탐라국왕은 유리도라(儒李都羅)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씨세보에 의하면 이때의 탐라국왕은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아니라 25대왕 ‘기(璣)’라고 되어 있다. 이런 문제는 좋게 평(評)해야 “일부 알려진 탐라식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위의 명단에서 탐라국의 15대왕 후(厚)는 신라 성시(盛時)에 아우들과 함께 삼형제가 항해하여 탐진(耽津)에 도착하여 신라로부터 ‘성주(星主) 탐라왕’이라고 칭호를 받았는데, 그 신라 성시(盛時)를 학계에서는 후기신라(속칭 통일신라)로 본다.

그런데 25대왕 ‘기(璣)’는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병진(476년)에 사신을 보내며, 26대왕 ‘담(聃)’은 백제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이 정벌해 오자 신라에 입조하여 사죄를 청한다. 즉 15대왕 ‘후’는 25대왕 ‘기’의 11세 조인데, 11세 손보다 11세 조가 무려 180~200년 후에 등장하는 셈이다. 위 아래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역사 사실을 고씨세보에 끼여 맞춘 것이다. 물론 고씨세보에는 후(厚)의 재위연대를 B.C.58년부터 B.C.7년까지로 주장한다. 그 시기는 신라 성시가 아니라 신라의 초대(初代) 왕이었던 혁거세(赫居世)의 재위기간(B.C.57~A.D.4)이다. 이러한 문제를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삼가하고, 여기에서 나는 “고씨세보에서 탐라왕계는 신뢰하기 어렵다”라는 점만은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성주왕자 10대 고인단(高仁旦)부터는 비교적 역사 사실에 가깝고 판단한다. 그는 『고려사』 「세가」 권제31., 1294년 11월 경술 조에 “十一月 庚戌 賜耽羅王子文昌裕, 星主 高仁旦, 紅鞓·牙笏·帽·盖·靴, 各一事. 耽羅今歸于我, 故有是賜‥‥‥”이라며, 즉 “11월 경술 탐라왕자 문창유(文昌裕)와 성주(星主) 고인단(高仁旦)에게 홍정(紅鞓)과 아홀(牙笏), 모자, 양산[盖], 신발을 각 1개씩 하사하였다. 탐라가 이제 우리나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이 물건을 하사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성주로 고인단(高仁旦)이 언급되고 있다. 『고려사절요』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탐라국의 왕계와 성주왕자의 계대(系代)는 172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 모흥혈 신화의 접근

『제주고씨세보』의 제주삼성묘도,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제주고씨세보』의 제주삼성묘도, 1918년, 목활자본, 3책. 필자 소장본. 사진Ⓒ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위에서 살펴본 탐라국왕과 성주왕자의 계보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탐라국의 모흥혈 신화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신화는 고대인들의 믿음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24회 연재의 「1) 려말선초 백두산 문학의 발아」 부분에서 “문화사나 문학사에서는 『성경』을 종교문학 작품으로도 정의할 수도 있다. 인간이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Storytelling)은 결국은 문학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도 역사문학작품으로 볼 수가 있다.”고 하였고, 또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백두산 문학의 시작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선」조. 즉 단군신화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나는 제주 문학의 시작은 고대 탐라인들이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Storytelling)으로 보며, 그 핵심에 모흥혈의 삼성인(三姓人) 신화가 있다고 본다. 제주의 다른 신화는 모흥혈 신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나온 것이다. 모흥혈 신화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 『영주지』가 고려말에 편찬되었다고 해도, 그 원형은 탐라국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강력한 권력을 추구할 때 이러한 신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규원사화』에 수록된 단군조선의 왕계(王系)가 근대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단군은 실존 인물이고 단군조선은 실존하였다. 탐라국도 똑같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분명 실존 인물이고 탐라국은 실체가 있는 국가이다. 그들의 실존 연대 설정은 근대에 어느 한 개인이 불합리하게 설정하였을 뿐이다.

모흥혈 신화는 “고대인들이 왜 그러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문화사적 입장에서 돌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 신화의 대부분은 천강신화(天降神話)이다. 단군신화가 그렇고, 가야나 신라의 신화도 그렇다. 고주몽의 탄생설화도 천강신화의 일종이다. 그러나 탐라의 신화는 신인이 땅에서 용출(湧出)한 신화이다.

사람이 땅에서 나왔다는 용출신화는 『성경』 「창세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첫 인간 아담을 흙으로 지었다는 것과 상통(相通)하기도 한다. 나는 모흥혈을 가볼 때마다, 마치 새 둥지처럼 안온(安穩)함을 느낀다. 세계에 이토록 작은 공간을 성씨의 발상지이자 국가의 발상지로 지목된 장소는 달리 없을 것이다.

아. 탐라국을 유추함

탐라국 시대의 호구수와 인구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그 단초를 『삼국유사』 권1 「기이」1 ‘72국’ 조에 인용한 『통전(通典)』에서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0여 국이 되었는데, 지역은 모두가 사방 백리”라고 한 것과 『후한서』에는 “갈라져 78국으로 되었으니 각각 만호씩”이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도는 세 개의 부족 권력이 있을 수 있는 충분한 크기의 섬이다. 세 개의 부족이 연합한 탐라국의 인구를 최대 3만호로 잡는다면, 대체로 탐라국은 전성기에 5만~10만 명의 인구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의 인구로서는 탐라국이 강력한 왕권이나 군사력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농업 축산 해산물의 생산과 교역으로서 탐라국 경제와 국체(國體)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나 신라에 복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나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史書) 속에 언급되는 조공(朝貢)이나 공물(貢物)은 외교적인 수사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탐라국은 이러한 가운데 독자 생존하였다. 전성기의 탐라국은 해상왕국답게 수백 척의 배를 한꺼번에 건조할 능력이 있었고, 중국 일본 한반도의 옛 국가들에 해상 무역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제주가 해상왕국에서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1273년에 삼별초 항쟁이 완전 진압되면서부터로 보인다. 제주를 정복한 원(元)나라는 한 세기가 넘도록 탐라국의 모든 것을 빼앗고 주저앉혔고, 이후 묵호의 난으로 제주의 인구는 급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51년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재주의 “호수(戶數)가 5천2백7호요, 인구가 8천3백24명이요, 군정은 2천66명이다. 【마군(馬軍)이 8백43명이요, 보군(步軍)이 1천2백23명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1450년대 제주의 호구수와 인구수이다. 호수가 5,207호에 인구가 8,324명이라는 것은 한 호에 1.6명이 살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마군이 843명이고 보군이 1,223명, 도합 군정이 2,066명이라는 것은 인구 4명 중 1명이 군정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을 제외한 활동 가능한 남성의 거의 절반 이상이 군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주 처참한 지경(地境)이다. 즉 조선초기에 이르러 성주제(星主制)를 스스로 폐지하고 조선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것은 이러한 조선초기 당시의 처참한 경제 및 정치 환경적 요소 때문으로 보인다.

자. 맺음말

필자는 제주의 인터넷 뉴스 [제주투데이] 2017년 9월 18일 자에 “서귀포의 ‘서복기념관’을 ‘한중고대문화교류기념관’으로 발전적으로 개편하여야”라는 담론을 기고한 바 있다. [참조 기사 보기]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808

그 글에서 나는 “서복(徐福 ; 徐市, BC255~?)이 진시황을 속이고 막대한 재물을 사기(詐欺) 친 후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나온다. (중략) 고려말 조선초의 모화사상에 찌든 사대주의자들이 사마천의 사기에 편승하여 국내의 명승지 몇 곳을 서복과 관련된 유적지로 각색한 것이 이른바 요즘 회자되는 국내의 서복 유적지이다. 민족주의적 민족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서복의 한반도 방문은 모화사상의 사대주의자들이 중국 『사기』를 확대 해석하여 만들어 낸 허구인 것이다. (중략) 중국인들에게 서귀포의 ‘서복기념관’은 마치 서복 일행이 제주에 탐라국을 세웠고, 고대의 제주인들이 서복 일행의 후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갖게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필자는 “사마천의 『사기』는 8세기 말에 당으로부터 신라로 유입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널리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조선이 유교의 실천을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정하고 모화사상이 등장하면서 이 책의 수요가 확장하였고, 국내에서도 출판하게 되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사기』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세종초기에 경자자로 찍은 금속활자본이다. 경자자가 1420년부터 1434년 사이에 사용된 활자이고, 인쇄 상태를 보았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7년(1425년) 1월 24일조에 “사마천의 『사기』를 인쇄하여 반포하고자 하니, 그 책을 인쇄할 종이를 공물로 닥나무를 사서 제조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라”고 세종이 충청 전라 경상도 감사에게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경자자본 『사기』는 1425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찍혀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서복의 이야기가 확대(擴大) 재생산(再生産)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였음을 주장하였다.

그 기고에서 필자는 ”원래 문화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고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고대 중화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고대의 우리 문화도 고대의 중화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고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면, 고대 일본의 문화도 고대 우리나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외래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과신하는 행위이다.“라고 지적하였다.

5년 전 기고를 이 글에서 다시 꺼내어 언급하는 것은 탐라국과 서복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탐라국이 자리를 잡은 제주도는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신석기시대의 유적,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해상왕국으로의 탐라국이 있었다. 제주가 육지에 붙어 있다가 섬으로 된 것은 신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이후 제주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해상을 통하여 철기 유물을 가지고 도래하였으며 그 세력이 제주의 토호세력으로 자리잡은 모흥혈의 세 부족으로 본다. 즉 삼성인은 단군조선의 후예이고 우리 민족의 일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